▲ 제주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박하게 뻗은 전농로 벚꽃거리, ‘하빌리스 커피 로스터스’ 전경. 고인류 명칭 ‘호모 하빌리스’에서 따온 ‘하빌리스’는 ‘손재주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놀멍 쉬멍 걸어봅서, 제주
동네를 벗어나기 조금 이른 나이엔 가족여행으로, 머리도 옷도 엇비슷한 또래 사이에 섞일 즈음 수학여행으로, 지난 모든 여행이 가물가물 잊혀가면 자유여행으로 찾는 국내 여행의 시점이자 종점. 이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목적지에 더 이상 신비한 장소는 없을 것 같지만, 안락한 카시트만 벗어나도 많은 것이 다르게 보인다. 발을 헛딛는 순간 일상의 환상에 빠져들게 되는 섬. 빌린 차 없이, 있는 발로도 충분한 제주.
글 황예하 기자 / 사진 황예하 기자, 메가볼트
본 기획 취재는 국내 콘텐츠의 발전을 위하여 (사)한국잡지협회와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여행과 일상의 교차로에서
▲ 제주시 삼도동 골목 골목에서 마주친 사인들. 부착 방식도 소재도 모두 다르지만 각기 매력이 뚜렷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천수관음상을 연상케 하는 ‘아트세닉’의 간판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이라는 특징을 재미있게 녹여냈다.
굽이치는 산길 너머의 맛집, 핫 플레이스, SNS에 올리기 좋은 해안도로와 차박 캠핑장. 제주도에 대한 정보는 그 어느 여행지보다 풍부해 차고 넘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이번엔 제주도로 가. 그 한마디만 해도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들로부터 메시지가 멈추지 않는다. 순식간에 포털사이트를 방불케 하는 십수 가지의 조언이 쏟아진다. 어디에 무슨 맛집이 있고, 어느 쪽 해안도로가 사진 찍기에 좋다고.
하지만 정보량이 많다고 해서 그게 모두 유효하거나 유익한 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생각으로 모두가 차 끌고 가보라며 추천하던 핫 플레이스는 되도록 제하고, 요즘 통 믿기가 겁나는 일기예보도 여러 앱과 사이트를 비교해 최대한 그럴싸한 쪽을 우선 참고했다. 그러나 신중을 초과한 불신의 값은 쓰게 돌아오는 법. 제주도에 도착해 맞닥뜨린 첫 풍경은 비행기 유리창을 촉촉이 적시는 비였다. 그래도 이대로 돌아갈 순 없으니 우산을 바투 붙들고 공항을 벗어나기로 했다.
▲ 통일된 색 스테인드글라스가 은은한 빛을 내뿜는 카페 ‘제레미’. 눈에 띄는 특징이 뚜렷해 기억에 오래 남는 장소다. 낮에도 실내조명이 어렴풋이 넘어다 보이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 있으면 저녁 무렵이 기다려진다.
쏟아지던 조언을 뒤로하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공항을 이웃하고 항구를 머리에 인 제주 구도심. 날이 맑다면 양손을 가볍게 흔들며 걸어보고 싶은 곳이다. 때마침 하교하는 중고생들과 나란한 방향으로 걷는 동안은 여기가 우리 동네였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 만큼. 횡단보도 신호등 아래 대파가 삐져나온 비닐봉지를 든 사람과 여행용 짐가방을 끄는 사람이 나란히 걸음을 멈춰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곳이기도 하다. 키 높은 관광호텔이 늘어선 길목이 있는가 하면, 층 낮은 주택 사이에 카페가 자리 잡은 골목도 더러 있다. 그야말로 여행과 일상이 교차하는 지역인 셈이다.
가늘어가는 비와 함께 낙엽이 떨어지던 전농로 벚꽃거리부터 민속자연사박물관을 지나, 산지천을 따라 넓게 걸으면 그런 오묘한 분위기가 내내 이어진다. 오래되어 칠이 떨어진 간판을 보고 오십 보 정도를 더 가면 갓 꾸민 듯 신선한 사인이 나타난다. 관광지로서의 역사가 유구해서일까, 유동인구를 사로잡을 만한 재미있는 시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아마 사람 하나 지나지 않는 골목 같아도, 이어폰을 빼는 순간 어디선가 캐리어 바퀴 끌리는 소리가 울리는 곳이라 가능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태양을 따라서, 흐름을 따라서
▲ 애월 카페거리에 자리한 ‘다운타우너’의 앞마당. 정면에서만 적어도 네 개의 사인이 보인다. 어깨동무한 마스코트와 돌하르방 조형물은 인근을 찾는 인스타그래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포토존이다.
노을 지는 제주 바다를 감상하기 좋은 서쪽. 한담해변을 기반으로 하는 애월 하늘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예쁜 옷을 차려입은 여행객들은 비치체어에 등을 푹 맡긴 채 늘어져 맛 좋은 커피와 함께 노을을 감상한다. 파랗던 하늘의 색온도가 높아질수록 이 분위기는 고조된다. 알전구가 노을과 같은 색으로 밝혀지면 그때 애월의 저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반면 동쪽 끝이나 다름없는 월정리 해수욕장은 한낮의 바다다. 이제 떠오른 것 같은데 열기는 정오나 다름없는 햇볕 아래 서퍼들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길 새도 없이 파도를 탄다. 그들의 비활동적인 일행이거나, 어제 이미 저 재미를 즐긴 사람들은 길 건너 해수욕장을 내려다보며 화끈한 타코나 불맛 밴 고기를 즐긴다. 내리쬐는 볕이 강해 야외 좌석보단 실내석이 인기가 많다.
▲ 월정리 해수욕장 인근의 골목에서 목격한 책방. 돌담과 오래된 지붕의 조합 아래 굵고 선명한 글자 하나. ‘책다방’의 입체문자사인 이후로 이만큼 시선이 끌리는 간판은 또 없었다.
만약 월정리에서 시작해 애월에서 그날 일정을 마무리한다면, 태양을 쫓으며 하루종일 바다를 즐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건 약 73km, 서울에서 평택쯤 되는 제주도의 동서 간 거리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마당의 활용법부터 메뉴까지 모든 것이 다른 이 두 관광지는 여행객을 위해 차려진 상이나 다름없다.
애월과 월정리가 오롯이 관광 수요에 초점을 맞춘 곳이라면 서귀포는 관광객들이 찾는 것과 도민에게 필요한 것이 적절히 섞인 관광지다. 제주 구도심이 조금 더 주거지역에 가까우면서도 실험적인 분위기라면, 서귀포는 전형적인 관광지와 번화가의 느낌이 강하다. 제주도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서귀포 어딘가에 뚝 떨어져 버렸음을 깨닫기도 전에, 일단 일어나 먹고 마시고 둘러보며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여행이라는 환상의 가운데
▲ 종달리의 두 책방 ‘책약방’과 ‘소심한 책방’. 멀지 않은 두 책방의 전혀 다른 첫인상이 흥미로워 하나로 묶었다. 종달초등학교 바로 뒤편에 자리한 책약방은 무인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제주도행 비행편 안에서 꾸벅꾸벅 졸아가며 했던 생각은 크게 두 가지였다. ‘뭔가 색다른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다른 데 다 있는 거 똑같이 있겠지’라는 이른 실망. 이제까지 취재를 위해 사전 조사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장소들은 사실상 SNS에 의한, SNS를 위한 상권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장소가 늘어나는 것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입장임에도, 매달 비슷비슷한 홍보에 파묻혀 허우적대다 보니 피로가 쌓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종달리에 도착한 것은 의도가 아니라 실수였다. 환한 대낮이 아니라 적당한 저녁에 찾을 생각이었고, 그 시간엔 지미봉이 아니라 세화해수욕장 인근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하지 않은 정류장에 불시착한 기자를 뒤로한 채 버스는 야속하게도 떠나버렸다. 그나마 갠 하늘이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평일 낮 종달리 입구엔 줄에 매인 흰 개 한 마리와 나, 둘 뿐이었다.
▲ 서귀포시청 1청사 인근에서 촬영한 카페 ‘블루하우스’의 전경. 야시장을 본격적으로 훑어보기 전 산책하듯 걷는 중에 마주친 곳이다. 큼직한 타이포그래피와 반만 가려진 블라인드, 선명한 조명의 삼박자가 잘 갖춰졌다. 이번 여행에서 저녁에 마주쳐 더 좋았던 장소 중 하나.
종달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높지 않은 경사를 걸어 내려가는 동안 들리는 건 담장 너머 어린이들 목소리가 전부였다. 서울로 돌아와 사진과 지도를 나란히 놓고 자료를 추릴 때가 되어서야 알음알음 여행객들이 찾아오는 동네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용했다. 내친김에 들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던 책방까지 쭉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그 뒤로 10분 정도 홀로 종달리 골목을 걷는 동안에는 어느 집 대청마루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와 벌이 귓가를 스치는 소리, 가끔 멀리서 잔뜩 신난 어린이의 비명 정도가 산책을 심심하지 않게 채워주었다.
그쯤 되니 차라리 잘 되었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애월이나 월정리에서처럼 여행객이 간판을 가려 한참이고 서서 기다릴 일도 없고, 시선을 돌릴 때마다 거미줄로 그늘 구석이 반짝이는 것마저 예뻤다. 작은 가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고, 모두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했다. 그제야 제주 여행과 한달살이의 열풍이 온몸으로 이해가 됐다. 강처럼 굽이치는 길을 따라 책방에 도착하자 고요는 깨졌지만, 직전까지 보았던 풍경을 떠올리면 언젠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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