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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시간을 뛰어넘다
전라북도 군산시
글 황예하 2021-08-25 |   지면 발행 ( 2021년 9월호 - 전체 보기 )




걸어서 시간을 뛰어넘다

전라북도 군산시
 
언젠가 책에서 읽기로 그리운 과거든 꿈꾸던 미래든, 원하는 시절에 곧장 도착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이 행성을 벗어나 빛과 나란히 달린다면, 그러면서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그렇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이론 속의 이야기였는데. 기나긴 운행 시간에 잠시 잠깐 조는 사이 새마을호가 그 방법을 터득한 것 같았다. 약간의 식도락과 걸음 멈춰 세울 만한 간판 정도만 소박히 기대하고 올라탄 열차는 시속 150km의 속도로 과거에 정차했다.
 
글 황예하 기자 / 사진 황예하 기자, 메가볼트
 
 
빛의 속도로 달릴 순 없어도


▲ 군산을 찾는 여행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른다는 관광스폿 경암동 철길마을의 모습. 1970년대 본격적으로 마을을 이루기 시작해 당대 지어진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있어 향수를 자극한다. 이제는 관광객들의 포토스폿이 된 철로는 2008년까지도 기차가 지나다녔다.

용산역에서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장항선을 따라 세 시간 남짓을 달리면 도착하는 종점 전 역. 새만금과 영화 촬영지와 짬뽕으로 알려진 곳. 다리 하나만 건너면 충청도가 시작되는 전라북도의 이 작은 도시는 그만한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 치고도 소박하단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동네다. 시가 운영하는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 신청한 관광홍보물이 우편으로 도착했을 때만 해도 소박이란 단어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군산시가 여행지로서의 군산을 소개할 때 주로 앞세우는 테마는 ‘시간여행’이다. 서해로 흐르는 금강 끝자락과 호남평야, 고군산군도가 있는데 시간여행이라니? 의아할 수도 있지만, 군산은 자연경관을 빼놓고도 이틀 치 여행 일정을 꽉 채울 수 있을 정도로 근대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사용됐던 건물을 현재까지 보존해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적산가옥을 개조해 꾸민 서점이나 카페를 흔히 볼 수 있다. 근대역사 체험공간이자 다다미가 깔린 게스트하우스 ‘여미랑’도 인기 있는 명소 중 하나다.


▲ 이제는 어엿한 우리 절이 된 ‘동국사’는 지붕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일본식으로 지어진 사찰이다. 평화의 소녀상의 뒤로는 일본 불교 대표 종단인 조동종의 승려들이 보낸 참사문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자행한 승려들의 첨병 역할을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이 담긴 비석이다.

이런 명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군산 시간여행마을은 1900년대 초부터 199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100년에 가까운 역사의 장면들이 그대로 박제되어 있는 곳이다. 게다가 각 명소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아 장미동에서 월명동까지,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느긋하게 걷더라도 30분이면 충분하다. 코스를 잘 구성한다면 반나절 사이에 근 100년의 세월을 두 번 세 번 주파할 수도 있다. 1908년 지어진 ‘호남관세박물관’과 1998년 개봉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초원사진관’을 걸어서 15분이면 오갈 수 있으니, 그야말로 걸어서 시간을 초월하는 셈이다.
 
 
낡았으나 지치지 않은


▲ 군산 시내 곳곳을 장식한 각종 사인과 조형물들. 인적 드문 거리에 세워진 조형물은 여전히 처음 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알록달록함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허전함이 느껴졌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시간을 초월하는 여행도 인상적이었지만, 시간여행마을이 남긴 깊은 인상만큼 잊지 못할 해프닝도 하나 있었다. 지역 주민들도 관광객들도 거의 찾지 않는 거리에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생긴 일이다.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숙소에 짐을 맡기고, 다시 나와 한참을 걸었는데도 인적이 없었다. 조금 더 돌아다녀 봤지만, 드문 것은 인적만이 아니라는 것을 목격했을 뿐이었다.

짬뽕특화거리 끝에서 물빛거리 끝까지, 각종 조형물과 가로등의 태를 보니 신경 써 조성했음이 분명한 거리에는 임차인을 찾는 종이가 수없이 나부꼈다. 주인 없이 낡아가는 간판 사이를 헤매느라 뒤집어진 가슴을 ‘진짜’ 번화가에 가 프랜차이즈 간판에 파묻힌 채 달래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요즘 젊은 세대가 자주 찾는 상권은 수송동 근처고, 최근에 많이 개발된 건 조촌동 쪽이라며 택시기사님이 너털웃음 지으시기 전까지는 그랬다.


▲ 우체통거리에 이은 또 다른 도시재생 사례 ‘영화타운’. 오래된 재래시장을 현대화하며 깔끔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시장으로 이용하는 인구보다 맛집, 핫 플레이스를 찾는 손님이 더 많아져 낮과 밤의 분위기가 사뭇 다른 곳.

몇해 전 굵직한 기업이 빠져나가며 군산엔 침체의 그림자가 드리웠다는 인상이 강하지만, 도로가 조밀하게 모여있는 부근을 둘러보면 침울함은 간데없이 활기찬 일상이 눈에 들어온다. 수송동과 조촌동 인근에서 마주친, 아이 손을 잡고 디저트를 사러 나온 젊은 부부와 이어폰을 끼고 앉아 다이어리를 쓰는 손님으로 자리가 모자란 카페 창가는 잘 가꿔진 삶의 풍경이었다. 이런 생기는 건물이 오래됐다 한들 낡은 티 하나쯤이야 감쪽같이 잊게 한다.

주요 관광스폿에서 여행객들의 안전한 관람을 돕고 있는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특히 활력이 느껴진다. 그중 인상 깊었던 건 신흥동 일본식 가옥 앞에서 만난 한 시민이다. 그는 코로나19로 입장 인원에 제한이 있어 가옥 앞에서 대기하는 여행객들에게 안내를 짧게 마치고 즐거운 목소리로 ‘우리 동네’를 자랑했다. “하루는 계수기를 들고 세어봤는데, 여기만 2천 명이 넘게 다녀가고 그랬어요.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많이 줄었는데도 그 정도 와요.” 애정과 자부심이 함뿍 묻어나는 활기찬 목소리였다. 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군산은 지치지 않았다.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


▲ 찬찬히 걸으며 구경할 거리가 가장 많은 월명동은 골목골목 탐방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기념품점과 독립서점, 시네마스토어가 한데 모여있어 여행객과 지역 주민들도 함께 어우러지게 된다.

다음 전시 준비를 위해 문을 닫은 박물관과 코로나19로 인해 휴업한다는 팻말을 내건 카페, 운영은 하고 있지만 그나마도 평소보다 적은 수의 손님만 대접할 수 있는 관광스폿들. 종일 걸어 도시를 둘러보며 차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여행의 도시에 여행객들은 과거를 구경하러 찾아오지만, 군산 사람들은 미래를 엿보고 싶지 않을까?

사진 한 장에도 즐거워 웃는 여행객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초원사진관에서 불과 300m 정도를 걸어가면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오래된 시장을 현대화한 ‘영화타운’이라는 시장이 있다. 거버넌스 우수사례로 꼽히는 재래시장이자 청년몰인 곳인데, 낮과 저녁의 풍경이 전혀 다르다. 지역 청년들이 맛집으로 꼽는 젊은 가게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군산 원도심은 영화타운을 포함한 근대역사거리와 같은 도시재생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제 생활권과는 동떨어져 있어 여행객들은 막상 찾아가더라도 쓸쓸한 거리 풍경을 보고 금방 발길을 돌리게 된다. 개항 당시 조계지로 개발된 후 이렇다 할 재개발 없이 이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점이 여행객들에게는 흥미롭겠지만, 시민들로서는 생활권과도 떨어진 오래된 관광지를 굳이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 월명동 관광스폿 중 가장 인기 있는 명소 ‘초원사진관’. 1998년 개봉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다. 원래는 차고였던 건물에 임시로 꾸렸던 것을 군산시가 영화 속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고.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에도 국내 여행을 떠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지만, 그때까지 생활권과 동떨어진 관광상권이 쓸쓸함을 견디고 다시 활기찬 계절을 맞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상황을 유지하며 버틸지, 지역민들이 여행객의 빈자리를 대신할지는 지금 같은 때가 지나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늦은 저녁 길 모르는 기자를 태우고 달리던 택시 안에서 또 짧은 동네 자랑을 들었다. 마침 창밖에 보이는 동백대교와 뜬다리부두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랑하는 대상이 다를 뿐, 구름에 묽어진 햇볕이 뜨뜻했던 신흥동 일본식 가옥 앞에서 만난 도시에 대한 애정과 꼭 닮아있었다. 이 시절이 다 지나고 나면 동네를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비로소 활짝 펴질 수 있기를 바란다.
 
 
※ 위 내용은 기사의 일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사인문화 9월호를 참고하세요.

<SignMunhwa>

위 기사와 이미지의 무단전제를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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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트렌드+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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